역사
교토는 천년의 도읍이라 불리지만, 나가오카쿄(784년)나 헤이안쿄(794년)보다 앞선 나라 시대에 이곳에 도읍이 설치된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지금으로부터 약 1,300년 전인 덴표 12년(740) 12월, 쇼무 천황은 헤이조쿄에서 현재의 기즈가와시로 천도하여 ‘구니쿄’를 세웠습니다. 도읍 기간은 덴표 16년(744)까지 불과 3년 3개월로 짧아 ‘환상의 도읍’이라 불렸으나, 그 짧은 존재는 일본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천도는 격동의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헤이조궁의 지진과, 영향력 있던 후지와라 사형제의 죽음을 가져온 천연두 대유행 등 혼란이 이어졌습니다. 쇼무 천황의 보좌였던 다치바나노 모로에는 견당사로부터 돌아온 기비노 마키비와 승려 겐보를 기용해 개혁을 시도했지만, 이는 후지와라노 히로쓰구의 난을 불러 정치적 불안을 초래했습니다.
구니쿄의 입지는 고대 도읍으로 이상적이었습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남쪽으로 강이 흐르는 지형이었습니다. 훗날 『만요슈』를 편찬한 오토모노 야카모치는 젊은 관료로 이곳에서 봉직하며 그 자연미를 노래했습니다. “지금 세우는 구니의 도읍은 산과 강의 맑음을 보면 참으로 그러함을 알겠다.”
구니쿄가 도읍이던 짧은 동안, 쇼무 천황은 일본을 영원히 바꾼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국가 재정 안정을 위해 ‘삼세일신법’을 ‘간전영년사재법’으로 바꾸어 개간자가 토지를 영구 소유할 수 있게 했습니다. 또한 불교에 의한 국가 수호를 위해 ‘국분사 창건의 조’와 ‘대불 조영의 조’를 반포하여 모든 생명의 번영을 기원했습니다.
헤이조궁에서 해체되어 구니노미야로 옮겨진 대극전은 744년 도읍이 난바궁으로 옮겨진 뒤에도 구니에 남았습니다. 이 황궁 건물은 야마시로국분사의 금당으로 변모해 당시 일본에서 가장 장엄한 사찰이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칠층탑 초석은 오늘날까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중심 기둥을 받치는 초석 지름은 1.5미터에 달합니다.
천도에 앞서 쇼무 천황은 관료들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181명이 구니쿄 잔류를, 153명이 난바를 지지했습니다. 지역 주민들에게 물었을 때는 압도적으로 구니쿄가 선택되었지만, 결국 도읍은 난바궁으로 옮겨졌습니다. 교토부 교육위원회는 1973년 이래 이 ‘환상의 도읍’을 지속적으로 조사해 왔으며, 가장 중요한 궁역은 현재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일본사 이 중대 시기에 관한 새로운 통찰을 계속 밝혀내고 있습니다.